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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바꾼 헌재판결] 2011년 ‘친일재산환수’ 합헌 결정<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장 기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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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바꾼 헌재판결] 2011년 ‘친일재산환수’ 합헌 결정<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장 기고>

조유진 소장 2017. 9. 1. 11:50

http://blog.naver.com/with_bubmusa/221074932059

 

대한민국을 바꾼 헌재판결 (8)
2011년 ‘친일재산환수’ 합헌 결정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 제헌헌법 제102조(부칙조항)



친일파 후손들의 잇따른 토지반환소송,  「친일재산환수법」 제정


 2011년 3월 31일. 헌법재판소는 역사적인 결정을 한다. 바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약칭 「친일재산환수법」)1)의 친일 재산 환수 규정에 대해 합헌 결정을 한 것이다. 이 결정은 대한민국의 기원이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으며, 제헌헌법이 국회에 부여한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법 제정 권한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밝힌 매우 뜻깊은 결정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최악의 친일파로 꼽는 이완용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고,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이자 정부 전권위원으로서 일본과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한 공로로 백작의 지위뿐 아니라 일제로부터 많은 재산을 하사받는다.

이를 통해 이완용은 당대 조선 최대의 부호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사망하기 전 해인 1925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이완용의 재산은 3백만 원,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5백억 원가량으로 추산되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부자는 일제로부터 자작을 하사받은 민영휘로 재산가액이 6천만 원에 달했다. 물론 이는 밝혀진 재산만 집계한 것이므로 감춰지거나 다른 사람 명의로 된 것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이들 친일파의 후손들이 국유 또는 다른 사람 명의로 등기되어 있는 토지에 대한 반환소송을 법원에 제기하기 시작했다.

1997년 서울고등법원은 이완용 후손의 토지반환소송에 대해서 “반민족행위자나 그의 후손이라고 하여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 재산권을 박탈하거나 법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한다. 이 판결로 이완용의 후손은 당시 시가 30억 원 상당의 토지를 반환 받았다.

그러나 이 판결 이후 국민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다. 친일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법원이 보호해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그러한 재산은 국가가 환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국민뿐 아니라 사법부 내에서도 비판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우리 법률상으로는 친일재산을 환수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설령 그런 법을 만든다 하더라도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3조 2항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국회는 친일재산 환수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지자 2006년 「친일재산환수법」을 제정하였다.

1) 헌법재판소는 이 법률의 약칭을 ‘친일재산귀속법’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친일재산환수법’으로 부르기로 한다.



헌법재판소, 「친일재산환수법」 ‘합헌’ 결정


법이 제정되자 정부는 그해 7월 대통령 직속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친일재산들을 환수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친일파 후손 64명이 「친일재산환수법」이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했다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한다.

친일파 후손들은 이 법률에서 친일파의 범위를 규정한 정의규정은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되고, 일제강점기에 친일파가 취득한 재산을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추정하는 추정규정은 재판청구권과 적법절차의 원칙을 침해하고 있으며, 친일행위 취득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귀속규정은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침해 금지조항에 위배되고 평등의 원칙에 반하며 헌법이 금지한 연좌제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5(합헌)대 2(일부 한정위헌)대 2(일부위헌)의 의견으로 「친일재산환수법」에 대한 합헌 결정(2011.3.31. 2008헌바141)을 내리면서, 친일파 후손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1. 친일파 범위 「반민규명법」에 의거, 명확성 원칙 위배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는 친일파의 범위를 규정한 「친일재산환수법」의 정의규정이 2004년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약칭 「반민규명법」)에서 정한 바에 따르고 있고, 「친일재산환수법」의 적용 면제사유인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 경우’도 얼마든지 해석을 통해 판단이 가능하므로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친일재산환수법」에서 준용하고 있는 「반민규명법」 상 친일반민족행위의 개념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시(1904.2.8.)부터 광복(1945.8.15.)까지 행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1.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2.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3.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4.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그 단체의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활동을 주도한 행위

5.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

6.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7.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8.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9.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

10.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1.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宣傳)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12.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5. 판사·검사 또는 사법관리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6.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8.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

19.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

20.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에 의한 민족문화의 파괴·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반출에 적극 협력한 행위
 
따라서 총리대신으로서 전권을 위임받아 한일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하고, 그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귀족원 부회장을 거쳐 일본인도 어렵다는 후작의 작위에다 그 아들까지 남작의 지위를 수여 받았던 이완용을 비롯하여 헌법소원을 제기한 64명 후손의 친일파 선조들 모두 위 규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2. 친일재산 반대사실 증명 가능, 재판청구권 및 적법절차 침해 아니다.

또, 헌법재판소는 「친일재산환수법」이 러일전쟁 개전 시부터 1945.8.15.까지 친일반민족 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을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같은 추정은 그것이 아니라는 반대사실을 들어 뒤집을 수 있고, 그 반대사실을 증명할 책임은 후손에게 있는 것이 사리에 맞으므로, 헌법이 보장한 재판청구권이나 적법절차의 원칙을 침해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특히 헌법재판소는 나치 등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겪었던 다수 국가들의 과거사 청산에 관한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외국의 여러 입법례들은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때 그 재산이 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되었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이를 몰수할 수있도록 규정하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이처럼 단호한 조치를 통해 반민족행위로 축적된 재산은 결코 보호되지 않는다는 사회 정의 관념을 구현하였고,설령 그들의 일부 재산이 스스로의 경제적 성과를 통해 손수 획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배반했던 공동체가 이룩한 국가질서 안에서는 그와 같은 경제적 이익의 향유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는 강력한 경고를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친일재산환수법」의 추정조항은 비록 입증책임의 일정부분을 재산소유자에게 전가하고 있을지라도, 추정 번복의 기회를 충분히 보장함으로써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에 한정하여 국가귀속을 도모하고 있으므로, 대가 여부를 불문하는 다른 나라들의 과거사청산 입법들에 비해 오히려 절제되고 합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다.


3. 친일 대가 특정재산 귀속, 재헌헌법에도 명시되어 소급입법·연좌제 해당 안 된다.

마지막으로 헌법재판소는 「친일재산환수법」이 아무런 보상 없이 친일파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있는 것은 헌법 전문에 규정된 3·1독립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라는 헌법이념 구현을 위한 중요한 공동체적 과업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 법률에 의해 국가에 귀속되는 재산은 친일파 본인이 친일 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특정한 재산에 국한되며, 이미 1948년 제헌
헌법 부칙에서도 국회에 친일파 처벌을 위한 입법을 명령한 사실이 있으므로 「친일재산환수법」은 헌법상 금지된 소급입법이나 연좌제에 해당하지 않으며, 헌법이 보장하는 재산권이나 평등의 원칙을 침해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현행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3·1운동’의 정신은 우리나라 헌법의 연혁적·이념적 기초로서 헌법이나 법률 해석에서의 해석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헌재 2001.3.21. 99헌마139).

이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의 공헌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라는 점(헌재 2005.6.30. 2004헌마859) 및 나아가 현행 헌법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배격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헌법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고 헌법재판소는 밝혔다.

따라서 헌재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부정한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의 친일행위에 대하여 그 진상을 규명하고, 그러한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공적으로 회수하는 등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함으로써 민족의 정기를 바로세우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며 진정한 사회통합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헌법적으로 부여된 임무라고 보았다.



실제 재산환수는 미미, 지속적인 조사와 법적 근거 마련해야  


헌법재판소는 「친일재산환수법」에 대한 합헌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친일재산의 국고귀속은 생각만큼 순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헌법재판소도 인정하고 있듯이 「친일재산환수법」이 ‘합리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친일파 후손들이 친일재산이 친일반민족행위로 취득한 재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면 아무리 친일파 본인이 일제강점기에 취득한 재산이라도 환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2010년 「친일재산환수법」에 의거하여 정부가 친일파 168명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하였으나, 그 후손들이 연달아 소송을 내며 맞섰다.
 

2016년 8월 15일 현재, 법무부에 따르면 친일재산환수 관련소송 97건 중 93건이 종결되었으며, 그 중 국가가 91건을 이겨 97.8%의 승소율을 보였다. 하지만 승소했어도 국가가 돌려받은 재산은 친일파들이 일제강점기에 보유했던 재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행 「상법」 규정 상 그 후손들이 물려받은 토지를 팔거나 법인 재산으로 등록하는 경우에는 환수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친일재산의 대부분은 재산조사위원회의 심사 대상에도 오르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이완용은 일제강점기 여의도 면적 두 배에 가까운 토지를 소유했지만 국고로 돌아온 것은 이 토지의 0.09%에 지나지 않았고, 친일파 송병준의 경우도 일제강점기 하사받은 토지의 0.04%만 환수 대상이 됐다.

이런 것을 보면, 친일재산 환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우리 국민의 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향후 지속적인 조사와 법적 근거의 마련을 통해서 조국을 배신한 자에게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제재가 따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비로소 역사적 정의의 실현과 진정한 국민통합이 가능할 것이다.


■ 글 / 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장

[출처] [대한민국을 바꾼 헌재판결] 2011년 ‘친일재산환수’ 합헌 결정|작성자 대한법무사협회